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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Sakartvelo

by tostory1 2025. 4. 19.

조지아의 국기 (가운데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세인트 조지라고도 하며, 서양 이야기에서 드래곤을 찌르는 기사로 그려진다.)

1. 조지아의 위치

조지아는 동유럽과 서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식 명칭은 조지아 공화국이며, 수도는 트빌리시입니다. 면적은 약 6만 9천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 크기입니다. 인구는 약 400만 명 정도이며,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문화적으로도 독특한 나라입니다.

조지아는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흑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다양한 문명과 문화가 오가는 통로로 기능해 왔습니다. 또한 실크로드의 주요 경로 중 하나였던 만큼, 역사적으로 무역과 교류의 중심지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오늘날에도 조지아의 외교, 경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2. 조지아 국명의 기원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수도 트빌리시를 세운 왕 '바흐탕 고르가살리'의 무덤이 있다.)

조지아라는 이름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역사적·문화적 배경 속에서 다양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명칭이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 중 하나는 조지아라는 이름이 '성 게오르기오스(St. George)'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입니다. 조지아 국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성 게오르기오스를 수호성인으로 숭배해 왔으며, 그의 상징은 조지아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럽의 중세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이 지역을 ‘조지아(Georgia)’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 다른 유력한 설은, 조지아라는 명칭이 페르시아어 ‘구르주(Gurj)’ 또는 ‘구르잔(Gurjān)’에서 유래했다는 설입니다.

'구르크(Gurg)'는 페르시아어로 ‘늑대’를 의미합니다. 이는 조지아 사람들의 용맹함과 전사적 기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지역을 이러한 명칭으로 불렀으며, 이후 유럽에 전해지면서 ‘조지아’라는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조지아의 고대 왕인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의 이름 역시 ‘늑대의 머리를 지닌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 조지아 민족과 늑대 사이의 문화적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상징적인 사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편, 조지아인들은 자국을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조지아 중부의 역사적 지역인 ‘카르틀리(Kartli)’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카르트벨로’는 ‘카르틀리 사람들의 땅’을 뜻합니다.

이는 외부에서 불리는 ‘조지아’라는 이름과는 달리, 조지아인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자국을 일컬을 때 사용해 온 고유한 명칭으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조지아의 역사

그리스 신화 '이아손과 황금양털'

조지아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깊은 역사를 지닌 나라로, 다양한 제국과 민족의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해 왔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아온 흔적이 있으며, 이는 조지아 문명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대 조지아에는 '콜키스(Colchis)'와 '이베리아(Iberia)'라는 두 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서부의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 신화에서 ‘황금 양털’ 전설의 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조지아가 이미 고대 세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동부 지역의 이베리아 왕국은 기원전 4세기경 성립되어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갖추며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아나톨리아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세력이 이베리아 왕국을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며, 기원전 550년부터 300년 사이에는 이 지역이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셀레우코스 왕조 등 여러 제국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이후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 제국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격파하고 독립 아르메니아 왕국을 수립하였으며, 약 백 년 뒤에는 동로마 제국이 카스피해에서 터키 중부에 이르는 지역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조지아 형성에 결정적인 기반이 마련됩니다.

4세기 무렵, 조지아 동부의 이베리아 왕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며,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기독교를 국교화한 나라 중 하나가 됩니다. 이후 조지아는 조지아 정교회 중심의 고유한 종교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5세기 이후에는 서부 조지아와 서아르메니아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5세기말 바흐탄그는 당시 페르시아와 투쟁하며 조지아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지키려 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며 동로마 제국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동부 이베리아는 7세기 중반까지 페르시아 제국, 이후에는 무슬림 아랍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시기 아랍과 비잔틴 간의 충돌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으며, 결국 1060년경에는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이 지역 전반에 영향력을 확대하게 됩니다. 당시 조지아는 ‘이베리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있었으며, 셀주크의 압박 속에서 많은 조지아 기독교인들이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122년, 조지아는 아랍 세력으로부터 수도 트빌리시를 회복하면서 중세의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이 시기 조지아 왕국은 다비트 4세와 타마르 여왕의 통치 아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영토는 아제르바이잔 서부와 터키 동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조지아의 중세는 건축, 예술, 문학 등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룬 시기로, 지금까지도 조지아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번영도 오래가지 못해, 13세기 초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조지아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에 많은 영토를 빼앗겼었다.), 이후 약 800년 동안 외세의 간섭과 지배를 받게 됩니다. 조지아는 여러 봉건 제후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번갈아 받는 고난의 시간을 겪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러시아 제국이 조지아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고, '예카테리나 2세(대제)'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조지아 서부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동부 지역까지 확보하며 조지아 전역을 사실상 러시아 제국의 영향 아래 두게 되었고, 1870년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지아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조지아 내에서는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민족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제3그룹에는 이오세브 주가슈빌리, 훗날 ‘철의 사나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오시프 스탈린이 속해 있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되자 조지아는'조지아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국제사회는 이를 정식으로 승인하였습니다. 러시아도 초기에는 이를 인정했으나, 곧 소련 붉은 군대가 조지아를 다시 점령하여 조지아는 소련의 자치공화국으로 편입됩니다. 이후 조지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자캅카스 연방을 구성,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조지아 출신이었던 스탈린은 오히려 자국 내 민족주의자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으며, 10만 명이 넘는 조지아 지식인과 민족주의자들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비극적인 일도 벌어졌습니다. 1936년에는 자캅카스 연방이 해체되고, 조지아는 ‘그루지야’라는 이름으로 소련 내 공화국으로 재편되었지만, 완전한 독립국으로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조지아는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독립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바탕으로 오늘날까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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